스포츠 담론/국내축구

[축구칼럼] 이기제를 위한 짧은 변론

Magnetic north 2024. 1. 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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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좋아 매일 축구를 보고싶어 택했던 직업 축구기자. 기자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그 바람 하나 만큼은 제대로 성취했다. 정말 축구를 매일 취재하고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행복도 잠시, 일을 거듭할수록 느낀게 있다면 "무슨 축구 경기가 이리도 많지?" 좋을줄만 알았던 나의 낙, 축구 경기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았다.

 

따지고 보면 축구공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추춘제인 유럽리그가 종료되면 춘추제인 K리그가 개막한다. 심지어 이 둘이 겹치는 기간도 있다. 낮에는 K리그, 새벽에는 시뻘건 눈으로 유럽축구를 챙겨야한다. 그뿐일까.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아시안컵, 올림픽, 아시안게임, 지구반대편 코파아메리카부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현존하는 축구대회를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정도다.

 

말하고 싶은 것은 축구인들의 시공간에서 축구는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일반 대다수의 국민들 시선은 다르다. 이들에게 축구는 오로지 '국가대표 경기'에 한정된다. 꼽아보자면 가장 인기있는 월드컵, 다음으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아시안컵 순서일거다. 즉 손흥민과 이강인, 김민재 등 주요 국가대표 선수들이 나오는 A매치 경기들이 일반 사람들에겐 축구의 전부다.

 

 

 

축구인들과 일반 사람들의 '축구 시공간'이 교차하면서 생기는 공백지대가 있다. 일반 국민들의 시야에 없던 이른바 '듣보잡' 선수들의 존재다. 분명 월드컵때 보지 못했던 낯선 이름들이 스쿼드에 보이는데 이게 여간 불편할 수가 없다. 이들은 주로 유럽이 아닌 K리그 소속인 경우가 많다. 골키퍼 조현우처럼 월드컵 때 미친 활약으로 눈도장을 찍지 않고서야 K리그 선수들은 사실상 조기축구 소속 겉절이로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익숙한 유럽파가 아닌 처음 보는 이름은 일단 팔장을 끼고 무슨 빽으로 뽑혔을지 검증을 시작한다. 

 

독특한 것이 손흥민이나 이강인 등 에이스급 선수들이 못해도 한없이 관대하더라도 이 듣보잡 선수들에게는 냉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한 경기가 아닌 볼터치 한번 실수하더라도 무수한 비판을 쏟아낸다. 사실 비판도 아닌 맹목적 인격모독 수준이다. 그리고 꼭 따라붙는 꼬리표가 축협 인맥으로 선발됐다는 등 허무맹랑한 낭설들이다. 실력도 이름도 없는 잡놈들이 대표팀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축협 비리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주장에는 어떠한 근거도 논리도 없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년간 구슬땀을 흘려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귀를 닫고 듣지도 않는다. 

 

이번 카타르 아시안컵 희생양이 바로 이기제 선수다. 이기제는 K리그 팬들이라면 다 아는 검증된 왼발잡이다. K리그에서 10년 가까이 활약하며 클린스만 감독에게 순수히 실력을 인정받았고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그럼에도 이기제는 '축협의 아들'로 주홍글씨가 찍혀있다. 배경도 없는 놈이라 여기는 탓이다. 물론 이기제가 막판 소속팀에서 많이 뛰지 못하며 몸이 덜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나는 이기제의 왼발은 대표팀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제의 실력, 경쟁력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겠다. 모든 축구인들은 이기제를 인정한다는 것이 팩트다. 월드컵만 되면 4년 주기로 축구팬으로 둔갑하는 이들이 뭘 알겠는가.

 

 

 

선수들은 컨디션 관리에 실패할 수 있다. 월드클래스 선수도 마찬가지다. 이기제는 아직 몸이 덜 만들어졌고 대회를 진행하면서 컨디션을 올리고 있다. 클린스만도 이점을 알고 첫 경기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이기제를 교체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보잘것 하나 없는 팬들 여론에 휩싸여 마치 '문책성 교체'라고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다. 팬들은 경기 부정적 요인의 모든 책임을 이기제, 한 명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커뮤티니, 영상 댓글의 8할 이상이 이기제 욕이다. 나머지 욕받이는 박용우인데 박용우의 출신도 이기제와 비슷하다. 그저 자신들의 눈밖에 있던 선수들을 마녀사냥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대표팀이 풀백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이기제를 선발했다는 상황을 전혀 모른다. 핵심인 김진수가 부상을 당했고 설영우는 경험이 너무 적어 불안하다. 이와 함께 이기제와 박용우가 그간 어떠한 모습을 보여줬고 활약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을 거다. 그저 굴러들어온 '적폐' 취급하며 인격 살인을 하고 있는 축구팬들은 그들이 중국팬들과 똑같이 미개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축구가 돌아가는 생리를 안다면, 한국 축구의 진정한 발전을 원한다면 이래서는 안 된다. 

 

평소에 축구에 관심도 없다가 오로지 대표팀 성적에만 열을 내고 선수들을 인격살인하는 이들은 진정한 축구팬이 아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축구를 볼 자격도, 즐길 자격도 없다. 우리는 선수의 노력을 알아주고 감독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한다. 그리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때 건전한 비판을 해도 늦지 않다. 이것이 성숙한 자세다. 감독에 대해서도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독일의 뢰브처럼, 일본의 모리야스처럼 장기 감독을 기다리지 못하는 냄비근성 팬들 탓이다. 

 

국가대표에 대한 나의 지론은 이렇다. 선수가 최선을 다했고 모든 것을 쏟았지만 결과가 어긋났을때는 비난이 아닌 박수를 쳐야한다. 같은 국적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위로하겠는가. 러시아월드컵때 단지 실수를 많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까지 싸잡아 매장된 장현수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팬들은 피치 위해서 최선을 다한 장현수에 돌팔매질이 아닌 응원의 박수를 보냈어야 했다. 물론 선수를 비난할 수 있다. 태극마크를 가볍게 여기고 경기에 건성으로 임한다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나의 인격체인 선수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이것 하나다. 

 

그들의 내면은 모르지만 나는 이기제와 박용우, 둘 모두 대표팀에 대한 마음과 열정은 손흥민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실력이 뒤처질 수는 있어도 누구보다 대표팀의 성공을 바라고 팀에 보탬이 되고 싶어할거라 확신한다. 단순히 출신 성분만 놓고 선수들을 색안경 끼고 비난한다면 감독들은 어떻게 선수들을 발굴하고 선발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미 대표팀 선발을 마치고 대회가 시작된 순간 이러한 비난은 영양가 하나 없다. 이제와서 선수를 다시 뽑으라는 얘기인가. 월드컵 경기 도중 감독을 경질해버리는 우리 팬들 수준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선수들을 신뢰하고 응원을 해주자. 그리고 즐기자. 축구는 공놀이 스포츠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승부 하나에 목숨걸고 선수 생명 하나를 말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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